'사는 일에 애쓰고 있다면, 글쓰기가 필요하다'라는 말에 신청했나보다.

 

상반기가 일찍 끝나니, 당장 할 것이 없었다. '일단 쉬라'는 지인들의 조언이 많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가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뭔가를 하자니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쉬자니 불편하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 상황이다. 그때 갑자기 태재 작가님의 [에세이 스탠드: 내 생활을 조명하는 글쓰기] 수업이 생각났다. (결국 글인 건가)

 

태재, <스무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태재 작가님의 신간 <스무스>는 태재 님 본인의 수영 기록이다. 부제는 <불가능했던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기까지 10개월간의 수영장 에세이>. 그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경험 이후로 수영과 담을 쌓았다고 한다. 20대 후반, '수영을 못 한다'는 마음의 소리(?)를 조정하여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로 바꾸고 수영에 도전했다. 내가 수영을 열심히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이 <스무스>를 추천해줬고 정말 단숨에 재밌게 읽었다. 꾸준한 기록의 힘이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세이 스탠드 수업을 들은 지인의 얘기를 듣고 언젠가는 수업을 들어봐야지라며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언젠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개강 당일 댓글을 남기고, DM을 보내서 수업을 신청했다. 다행히 내가 막차를 탔다. 수업은 늦은 8시였다. 나는 오후 6시에 수영을 하고, 7시에 밥을 먹고, 연남동으로 슬슬 걸어갔다. 연남동 487-6. 집에서는 약 20분이 걸렸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는 가을의 프리뷰가 녹아 있다. 연남동의 낮은 건물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걸었다. 초행길이라 노을보다 네이버 지도를 더 많이 봐서 아쉬웠는데, 다음주에는 노을만 보면서 걸어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연남동 487-6 헬로헬로

 

태재 님의 소개가 끝난 후, 짤막한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민경입니다. 스물아홉살이고, 아직 직업은 없습니다. 지인이 <스무스>라는 책을 추천해주셨고, 그래서 태재 님과 이 수업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왜 신청했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지금 딱히 할 게 없고, 게워내고 싶은 게 많아서 신청한 것 같습니다.

 

팩트였고,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잘 오셨네요'라고 태재 님이 인사를 해주셨다.

 


<글과 글쓰기에 필요한 공간과 환경>

1주 차 수업의 주제는 <글과 글쓰기에 필요한 공간과 환경>이었다. 수업은 대체로 태재님의 설명과 질문, 그리고 수강생들의 답변으로 진행된다. 가급적 모든 수강생들이 고루고루 말할 수 있도록 신경 쓰시는 것이 느껴졌다. 

 

1. 태도

Q. 가끔 일기를 쓰시나요?

Q. 일기와 에세이는 다를까요?

Q. 그때 왜 일기를 썼어요?

Q. 편지와 에세이는 다를까요?

 

일기, 편지, 그리고 에세이의 차이는 '관계성'의 차이라고 말씀하셨다.

일기는 작가와 독자가 모두 자기 자신이다. 나와 나가 관계를 맺는 글이 일기이다.

편지는 작가인 나와 특정 소수의 독자가 관계를 맺는 글이다.

그리고 에세이는 작가인 나와 불특정 소수 및 다수의 독자가 관계를 맺는 글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관계맺는 방식) 이 글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다. 자신을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용기를 가지고 쓰자는 말씀이 좋았다.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또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길에서 스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0은 아니지만 높지는 않다. 하지만 길에서 친구를 만났다면, 약속 등의 형태로 그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높다. 그런 의미에서 글이란 작가와 독자가 관계를 맺게 해주는 계기인 것 같다. 생각이 다른 작가라도, 살아온 환경이 나와 다른 사람이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오프라인이든, 책으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근사하다

'근사하다'의 사전적 의미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짧은 글에 익숙해졌다. 짧은 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생각을 연쇄적으로 하기 어려워진다는 것과 비슷하다. 태재 님은 "재미있어"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서, 좀 더 근사(近似)하게 표현하자고 하셨다.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좀 더 근사하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는 태재 님이 가진, 글에 관한 가치관인 것 같기도 하다. 간결한 문장으로 다듬고,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읽다, 의견을 읽다, 관점을 읽다, 태도를 읽다, 말투를 읽다, 주장을 읽다 등등 어떤 말로 바꿔도 글을 읽는다는 말과 통한다. 일기는 오늘 하루 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을 읽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쓰는 글은, 글자로 쓰는 내 생각이다.

 

2. 공간과 환경

글을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쓰는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쓰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무엇이 됐든 자신에게 맞는 환경과 공간을 찾아야 한다.

 

나만의 글쓰기 환경을 찾아서 만들기

 

  • 시간
  • 공간
  • 노트북 / 연필 / 펜(펜이라면 무슨 펜으로 어떤 종이에?)
  • 조도
  • 소음의 정도 / 배경음악
  • 온도 / 습도 등등

뭐 이렇게 까다롭나 싶을 수 있다. 글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할 때 본인이 선호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다. 도서관의 칸막이 열람실보다 트인 열람실이 더 공부가 잘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글도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서 써야 생각이 잘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소음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소음이 많은 카페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볼륨을 높여서 기타 소음을 차단한다. 그런데 태재 님도 비슷한 방법을 쓰고 계셔서 놀랐다.

 

인상 깊었던 것은, 손으로 글을 쓰기를 추천하셨다는 점이다. 나는 글을 펜으로 쓰는 것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글을 설계해서 쓰기 보다는 단숨에 몰아쳐서 워드에 쏟아내고, 계속 글을 고치고 수정한다. 태재 님은 '생각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손으로 글을 끌고 나가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3. 느낀점

나의 글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 글을 지쳐하는 사람들도 많고, 덕분에 별의별 피드백을 다 들어봤다. 가까워진 사람도 있고, 멀어진 사람도 있다. 가까워진 사람과는 내 글을 통해 관계를 맺은 것이고, 멀어진 사람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이겠구나. 아직,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이 무섭다. 

 

쉬는 시간에 태재 님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어느 쪽을 지망하는지, 마케팅이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씀드렸다. 힘이 빠져서 뭔가 허탈한 말투였던 것 같다. 그리고 '글을 같이 쓸 사람들, 공동체가 필요했다'는 말을 했는데, 적극 동의해주셨다. 글 쓰는 공동체는 태재 님이 에세이 스탠드를 매월 진행하시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연남동의 8시는 고즈넉하다. 수업을 하는 곳은 연트럴파크와 거리가 멀어서 조용하고 평온하다. 또한 조명도 포근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수업을 신청하기를 잘한 것 같다.

 

'솔직하게, 용기를 가지고 쓰자'는 말이 가장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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