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보통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주를 보는 순간은 흥미롭지만, 사주 결과에 내가 너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는 어찌보면 사주를 믿는 자가 하는 행동의 한 갈래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나는 '머리와 마음의 괴리'라고 표현한다. 머리로는 안 믿어, 안 믿어, 안 믿어라고 외치지만, 마음은 그래도 혹시나, 그래도 혹시나, 그래도 혹시나 라면서 상호배반의 모습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조화 역시 나의 감정의 낭비를 발생시키므로 나는 사주팔자풀이 근처에 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퍽 잘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생년월일시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의 동의 없이 - 사실 사주를 보는데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지만 - 나에 관한 사주를 보았다면 나는 이 변수를 통제할 수 없다. 작년 이맘때쯤, 어머니께서 외사촌누나의 결혼식을 다녀오셨다. 간만에 만난 이모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셨으리라 짐작된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이 불효자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이 있는 법. 이모께서는 부산의 용한 점쟁이의 존재를 어필하시면서, 그에게 이 불효자의 미래를 살짝 엿보자는 달콤한 제안을 건네셨겠지. 그리고 그 사주풀이는 꽤나 솔깃한 것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행정고시 보는 게 어떻겠냐"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의 뜬금없었던 질문 하나를 통해, 나는 이번 사주풀이가 어머님의 마음에 매우 흡족했던 말이라 짐작했다. 나는 왜 그러시느냐 물었고, "너 사주 팔자에 관운이 있대. 고시나 시험을 보면 잘 풀린다는 거야"라고 어머님은 답하셨다. 당시 나는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의 말씀을 드렸다.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밌고 잘 맞아요. 하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여름...

나는 요즘 문득, 내가 어쩌면 사주에 반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고시, 시험, 안정성이 내 사주를 대표하는 키워드(?)인데, 마케팅, 변수, 트렌드 등의 키워드와 함께 살아야 하는 삶을 지향해서 이 사단(?)이 난 것이 아닐까? 이쯤이면 할만큼 한 것 같고, 업무에 대한 관심도 있고, 일을 열심히 할 태도도 갖췄고, 능력도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매번 고배를 마시니 이쯤되면 이것은 알 수 없는 모종의 절대적인 힘이 나를 고난으로 쳐박아버렸다는 해석 외에는 없는 것 같다. "계속 그 업계로 자기소개서를 들이민다고? 실컷 해보셩~"이라며 큭큭대는 '모종의 절대적인 힘'을 상상하니 약이 오른다. 사주팔자대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기질대로 살아간다는 뜻일텐데, 나는 내 기질에 반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결국 기질이 제대로 발현이 안 되니, 남은 건 스트레스뿐. 기질에 반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는 나의 몫이고, 괴로워하는 나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가족의 몫이다. 기질에 반하는 나의 선택이 나와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한 번 더 나를 괴롭게 한다.

그렇다고,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고, 애초에 공직에는 원래 뜻이 없었다. 지금 내 인생에서 고시에 도전할 타이밍은 이미 놓친 것 같다. 만약, 사주에 반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의 프로세스가 계속 되는 것이라면, 그런데 이미 그 흐름을 틀어버릴 타이밍을 놓쳤다면, 나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하면 뭐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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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중에 이런 질문이 들어왔다.

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나는 이 질문에 '안전거리'라고 답했다. 안전거리. 안전을 위한 거리이자, 나를 지키기 위한 안전한 거리이다.


내게는 예나 지금이나 관계가 가장 어렵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재밌어 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을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훅 들어가거나, 해석에 따라 선을 넘는 발언들을 할 때가 있다. 명백히 내가 잘못한 상황을 인지하는 동시에, 타인의 질책이 더해지면, 나는 그 순간 자아비판을 시작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역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풀이 죽어버린 나는 그 뒤로 한동안은 어느 집단에서나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편을 택한다.

말을 하지 않게 되면 집단의 외곽으로 조금씩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밀려남의 끝에는 절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초조해지거나 체념하게 된다. 철없는 생각이 든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해줬으면.' 이 생각은 너무 수동적이라는 생각에 미쳐, 능동적으로 나도 말을 던져본다. 하지만 뭔가 엇나가는 느낌이다. 미끄덩미끄덩한 말의 감촉이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 허공에서 사라진다.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너무 힘들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해주면서 관계 안에서 서로를 깊이 이해해 나가는 모든 순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내 진심을 열어보였던 집단에서는 부담스러움을 받았고, 그 아픔 때문에 마음을 잠시 닫았던 집단에서는 미끄러졌다.

안전거리를 좀 줄여야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나는 그 적당한 수치를 알지 못한다. 
일단 안전해야 하기에 나는 그 수치를 넉넉하게 잡고,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아직까지 내가 생각하는 관계의 본질은 '안전거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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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르바이트를 가는 회사에서도 채용이 한창이다.

“정규직 전환 대상은 다 골랐고요, 한 명은 안 뽑으려고요.”
“네, 알겠습니다.”

채용 연계형 인턴이었나보다.
그냥 면접에서 떨어지는 것도 힘들텐데
일은 일대로 하고 인턴 후에 떨어지면 얼마나 속상할까.

구직자에게는 절실한 매 순간이, 실무자에게는 일년에 이따금씩 찾아오는 루틴한 순간이라는 사실. 그 접점에서 조만간 어떤 한 사람은 고배를 마실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힘내시길.

P.S) 그래도 공대니까 곧 취업하실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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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에세이 스탠드] 2주 차 과제입니다.

 여름 냄새나는 5월이다. 지하철 1호선의 에어컨 바람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몸과 옷 사이에 습기가 차기 시작한다. 여름이 오고 있다. 어제는 봄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비 비린내는 묵직했고, 비를 맞은 나뭇잎은 더 짙은 녹색이 된 것 같다. 여름을 판별하는 나만의 리트머스지 - 에어컨 속 곰팡내, 옷 속 습기, 봄비의 비린내 - 가 계절에 응답하면, 냉면집으로 향한다.

 냉면은 종류가 다양하다. 함흥냉면, 평양냉면, 해주냉면. 냉면의 원조가 어디냐를 두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 정도로 냉면에 조예가 깊지 않다. 특정 지역의 냉면을 초월해서냉면이라는 음식 자체를 좋아한다. 냉면은 그 온도만큼 저릿한 느낌으로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울푸드이다.

1.
 여름을 좋아하지만, 여름을 심하게 탄다. 초등학교 때 한약을 지으려고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가 진맥을 해보더니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열치열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차가운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더위에 지쳐 헥헥거리는 나와 동생에게

냉면 사주랴?”

라고 말씀하셨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에게 긍정의 표시를 내비쳤다. 할머니는 [원조칡냉면] 전단지를 꺼내신 후, 전화를 걸어 냉면을 주문하셨다. 30분 후 오토바이 헬멧을 쓴 아저씨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현관에 쪼그려 앉으셔서, 냉면 사리가 담긴 스티로폼 그릇과 육수가 든 플라스틱 물통을 꺼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가 면에 부어지면 우리는 재빨리 식탁으로 냉면을 운반했다. 할머니의 감사 기도가 끝나면 허겁지겁 냉면을 먹어 치웠다. 그 순간만큼은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열치열보다는 이냉치열이 더 맞는 스타일이었다.

 여름마다 할머니께서 사주신 냉면은 습관이 되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냉면집으로 향한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먹는다. 소화기가 약하지만, 아직 냉면을 먹고 체하거나 아픈 적은 없으니,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닐까?

 

2.
 할머니의 훈육(?)덕분에 여름만 되면 냉면을 찾던 나는 2017년 겨울부터 계절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먹었다. 2017 11월은 인생 최악의 한 달이었다. 입사 서류를 낸 모든 회사에서 탈락했고, 로스쿨 입학도 실패했다. 진로 상 암초에 부딪히니 부모님과 자주 다퉜고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여자친구와의 이별이었다. 이쯤 되니 인간의 기본 욕구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는데 5kg이 빠졌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친구 H가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
“…….”
됐고, 냉면이나 먹으러 가자.”

 <필동면옥> - H의 말로는 유명하다는데 나는 처음 들어 본 - 이었다.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니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한 맛집이라는 패가 걸려 있다. 우리는 물냉면과 수육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냉면 육수를 들이켠 후, 한 젓가락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 . . . 

 당시 나는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하지만 속을 열어보면 안에 천불이 났던 것이 분명했다. 취업, 인간관계, 가족 문제가 내면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냉면을 먹은 순간 그 불이 꺼진 느낌이었다. 위에 언급한 감탄사(아 . . . )는 속을 태우던 불이 꺼지면서 난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종교도 주지 못한 평화를 냉면에서 찾다니. 수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면만 먹었다. 육수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함이었다. 훗날, 친구는 그때의 내가 눈물짓고 있었다고 전했다.

 요즘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먹는다. 폭염일 때는 물론, 슬프거나 화가 날 때,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냉면을 먹는다. 육수의 깊은 맛, 면의 재료, 탄력 등은 잘 모르겠다. 다만, 지치고 깨지고 까맣게 타버린 속을 위로해 줄 음식은 냉면밖에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냉면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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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연희동 [밤의 서점]에서 박인한 선생님의 캘리그래피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다. 글씨를 '있어 보이게' 쓰는 법을 배울 줄 알고 갔다. 하지만, 기교보다는 '어떤 대상을 대상답게 쓰는 법'을 배웠다. 예를 들어, '엄마'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보자. '엄마'를 떠올렸을 때 드는 여러 감정들이 있다. 여러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글을 쓸 때, 나만의 '엄마다운' 글씨가 나올 것이다. '무언가를 무언가답게 쓰는 것'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캘리그래피의 본질이다.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캘리그래피의 이론적, 기술적 요소인 것 같았다. 기교보다는 본질이 중요하다. 그리고 감정은 추상적이어서 틀을 깨면 더 감정에 가까운 글씨를 쓸 수 있음을 배웠다. 세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틀을 깨는 실습도 많이 해서 좋았다.

무언가를 무언가답게 쓰는 것

그리고 얼마 전,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한 김상우 선생님과 '사랑'에 관한 수업을 기획하고 있는데, 베타 테스트 수업에 참여해줄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쓰는 사랑, 보는 사랑. 캘리그라피와 미술의 콜라보레이션

이 수업은 캘리그래피 배경의 인한 쌤이 '사랑을 사랑답게 쓰는 것'을, 미술사와 역사 배경의 상우 쌤이 '그림에서 사랑을 읽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사랑'이란 주제는 내게 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미술이라니. 미술은 중학교 이후로 연을 끊었다. 가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라고 쓰고 벽돌이라고 읽는다)를 사볼까 하다가 관둔 것이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다 싶었다. 마침 할 것이 없어진 찰나에 인한 쌤에게 연락이 온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합리화)하면서, 수업을 듣겠다고 말씀드렸다.

6월 18일. 1시. 합정동 [합정리과일집]으로 향했다. 합정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갔는데, 그냥 역에서 걸어가도 될만한 거리였다. 개인별로 다과와 커피를 주셨다. 심플한 카페와 잘 맞는 조합이었고, 세심한 준비가 느껴졌다. 수업을 듣는 사람은 총 6명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두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피드백을 하는 것이었다. 먼저, 인한 쌤의 캘리그래피 수업부터 시작됐다.

개인 별로 준비해주신 다과

#1. '봄, 사랑'을 '봄, 사랑'답게 쓰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평소 필체로 쓰면서 몸을 풀었다. 내 글씨체지만, 손글씨는 쓸 때마다 낯설다. 그만큼 내가 펜을 잡고 글씨를 쓰지 않는다는 방증이리라. 봄을 봄답게 쓰고, 사랑을 사랑답게 쓰는 연습을 했다. 처음 '봄'이라는 글씨를 쓸 때는 막막했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봄'을 썼다. 생각하니 다양해졌고, 다양해지니 표현이 달라졌다. 틀이 깨지는 경험은 늘 신선하다. 획을 긋는 것은 감정과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을 지니지만, 획이 그어지는 순간은 우연성을 갖는다. 개연성과 우연성의 모순이 공존하기 시작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사랑'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 다양한 표현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사랑을 사랑답게 써보았다

쓰는 행위를 통해 '감정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글씨를 보는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봄(La primavera)>

보티첼리가 어떻게 '봄'을 표현했는지 찾아보자

상우 쌤이 처음 소개하신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보티첼리의 <봄>이다. 그림을 보는 방법에 대해 간략하게 배웠다. 그림 전체를 다스리는 원칙을 '구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림 상단 중앙에 큐피드(에로스)가 있고, 그 아래에 비너스(아프로디테)가 있다. 큐피드를 제외한 인물의 구성은 1명/3명/1명/3명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구성'이다. 그런데, 그림이 재밌어지는 시점은 바로 이 원칙(구성)이 깨지는 시점이다. 선생님은 작가가 원칙을 깬 이유와 의미를 찾는 것, 즉 '저건 왜 저렇게 그렸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곧 그림을 보는 방법이라고 하셨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당대의 역사적 분위기, 작가의 다른 그림 등의 사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재밌어지는 시점은 바로 이 원칙(구성)이 깨지는 시점이다. 

한 폭의 그림 속에 많은 상징이 있었다. 그림 오른쪽의 세 인물은 (오른쪽부터) '제피로스, 클로리스, 플로라'이다.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봄의 여신인 클로리스를 강제로 취해, 꽃의 여신 플로라가 태어나는 것을 표현했다. 서풍이 불고 봄이 오면 꽃이 핀다. 하지만 그 방식은 강제적이었고, 이는 사랑의 폭력성을 의미한다. 그림 중앙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4월을 상징한다. 4월을 뜻하는 April의 어원이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왔다고 한다. 그 옆에 선 3명의 여성은, 비너스의 시종을 드는 세 명의 미신(美神)이다. 이들은 봄 같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맨 왼쪽에 선 남성은 전령의 신 머큐리(헤르메스)이고 5월을 상징한다. 오른쪽부터 순차적으로 3월, 4월, 5월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그림 상단의 큐피드는 사랑의 신이다. 그래서 큐피드의 금화살에 맞은 사람은, 화살을 맞은 후 처음 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 재밌는 점은 그의 눈이 가려져 있는 점인데,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무작위성을 읽어낼 수 있다. 우연처럼 찾아오는 건 르네상스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이외에도 그림의 배경에 나오는 오렌지의 의미 등도 배웠다.


#3.

눈이 떠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인한 쌤의 캘리그래피 수업은 틀을 깨는 느낌이고, 상우 쌤의 그림 수업은 틀을 받아 질문을 통해 틀을 깨는 느낌이다. 다루는 소재 - 글, 그림 - 는 다르지만,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 어떤 대상에 대한 깊은 생각과 표현! 앞으로 남은 수업 시간 동안 '사랑'을 성찰하고 표현하겠지. 아직은 모르는 것들 투성이지만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 본다. 1회 차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이었음에 불구하고 감탄사를 얼마나 내뱉었는지 모른다. 

캘리그래피나 그림이나 내게는 낯선 분야이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에 관한 현자도 아니다. 다만, 그림을 보며 질문을 던지고 감정을 느끼는 것과 손글씨를 쓰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은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가능성'에서 두 선생님이 만나, <쓰는 사랑, 보는 사랑> 수업을 함께 기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세 번의 수업이 남았다. 내 안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글을 표현하는 느낌과, 그림을 보는 하나의 눈을 얻어가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김영하 작가가 말한 '감성근육'이 아닐까.

[에세이 스탠드] 2주 차 수업을 들으러 갔다. 대화상점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시현 님과 홍대에서 얘기를 마치고, 강의하는 곳으로 향했다. 태재 님은 "열 명의 수강생 모두 글을 내셨다"라고 말씀하셨다. 대개 모든 수강생이 제출하지는 않는데 열 명 다 낸 것은 드문 일이란다. 글을 열심히 쓴 내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기로 한다.

에세이를 다듬는 기술에 대해 배웠다. 수업은 '각자 지금까지 들어본 글쓰기 공식'을 얘기하면서 시작했다. 자소서는 두괄식으로 써야 하고, 접속사를 가급적 쓰지 않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 생각났다. 이런 것들을 묶어서 '글을 다듬는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초고를 쓸 때 모든 방법을 적용하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초고는 내용에 집중하고, 다 쓰고 퇴고하면서 이 방법을 적용하면 글을 더 '근사'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를 다듬는 방향성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평범한 글을 특별한 글로
  • 단조로운 문장을 입체적인 문장으로

에세이를 다듬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배웠다. 이 글에 다 옮기면 수업 녹취록을 무단 배포하는 것이니까, 궁금하다면 [에세이 스탠드]를 수강하도록 하자. (현재 6월반 모집 중) 이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내용을 적어 본다.

 


 

* 비유(마치~, ~처럼) 점검하기 : 글에 사용한 비유가 꼭 필요한 비유인지, 과시하기 위한 비유인지 체크해보자
첫 시간에 배웠듯이 에세이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글이다. 글에 담긴 작가의 생각, 신념, 가치관 등이 독자와 잘 맞을 때 관계는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모르모트같은' 이라는 비유를 썼다고 하자. 이런 비유는 동물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마다 글을 다듬을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다. 결국 작가에 따라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르다.

* 일반화의 오류 - 위험한 것
글은 작가가 살아온 과정, 생각한 것, 작가의 편견이나 일상에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하며 편재성을 지닌 절대자가 아닌 이상, 한정된 것을 보고 느낀 글이라는 것이다. 소설이나 시에서 일반화 표현은 괜찮지만, 에세이에서는 과격한 표현이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 전체적인 맥락을 확인하는 방법: 내가 쓴 글이 줄거리가 될 수 있다면
글에 맥락이 일관적으로 이어지는지 보기 위해서는 글을 시놉시스처럼 쓸 수 있는지 확인한다. 시놉시스처럼 요약이 되면 전체적인 맥락이 잘 이어지는 글.

 


 

이론 수업이 끝난 후, 각자의 글에 관해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피드백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웠을 것 같은데, 인터뷰라고 표현하니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시간 같아서 부담이 덜했다. 같은 '비평'이라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느껴지는 것이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쓴 <언제쯤 맘 편히>(https://brand-brightinthesky.tistory.com/51)도 인터뷰 질문을 받았고, 읽으신 분들의 생각을 들었다. 태재 님의 피드백이 기억에 남는다. "글이 다소 무겁게 끝나는데, 우울한 결말에 중독되면 안 돼요"라는 의견을 주셨다. 아마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짜) 많이 뜨끔했다. 실제 내가 체감하는 내 글의 문제였다. 풀리지 않는 고민이다. 그래서 태재 님의 <스무스> 같이 독자에게 가끔씩 '풉'하는 웃음을 주는 글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면 좋겠는데, 글을 통해 위트를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 소중한 피드백이었다. 다음 글은 좀 다르게 써보자.

벌써 다음주면 마지막 수업이다. 아쉽다. 작은 공간에서 글과 삶에 대해 얘기하고, 웃던 순간들이 다음주면 끝이라니 아쉽다. 마지막 수업도 좋은 기억이 될 수 있도록 과제를 잘 써서 준비해야겠다.

이 글은 [에세이 스탠드] 수업 1주차 과제입니다.

 한 달 만에 집에 내려갔다. 집은 조용했고, 안방에서는 어머니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분과 통화를 하시는 것 같았다. 조용히 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갔다. 분명 저녁을 먹었는데 허기가 졌다. 찬장을 뒤져 너구리 한 봉지와 냄비를 찾았다. 거창한 음식을 해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물을 붓고 분말 수프, 플레이크, 다시마를 차례대로 넣었다. 빨간 국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면을 넣고 잠시 기다렸다가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었다. 냄비 가운데에 모인 면을 헤치고 계란을 하나 풀어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오셨다.

저녁 안 먹었어? 왜 라면을 먹어?”
먹었는데 배고파서요.”  

 식탁에 놓인 그릇에 라면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이소박이가 있었다. 라면은 보통 배추김치와 먹곤 하는데, 냉장고에는 오이소박이뿐이었다. 부추와 양념에 범벅이 된 오이소박이가 과연 라면과 맞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김치를 꺼내서 써는 게 귀찮아서 그냥 오이소박이를 먹기로 했다. 시큼하게 익은 것이 의외로 입에 잘 맞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 다시 취업 준비해야죠.”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거듭된 취업 실패 속에서 용기를 잃어가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육체의 짐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취업 후 부모님을 위한 계획도 많이 짰다. 일본 여행도 보내드리고, 회도 사드리고, 용산 CGV IMAX에서 액션 영화도 보여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부엌 한쪽에서 라면을 먹고 있다.

 사실, 내가 잘하는 음식이라고는 라면밖에 없다. “오빠, 요리할 줄 모르면 나중에 집에서 쫓겨날 걸”이라는 동생의 장난이 더 실감 나는 요즘이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없으니 취업 판에서 쫓겨난 것 같다. 세상에서 부가가치를 만드는 일을 못 한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래서 라면은 밥값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내가 내리는 벌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나의 탓을 하지 않기에, 최소한의 양심으로 내리는 벌이 라면인 것 같다.

언제쯤 마음 편하게 라면을 끓여 먹는 날이 올까.
아니, 이제는 라면보다는 집밥을 맘 편히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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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수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당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세먼지 속 다이닝>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말 그대로 미세먼지가 가득한 광화문 광장에서 밥을 먹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시간에 맞춰 3시에 갔다.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출석체크를 하고 스태프 목걸이를 찼다. 일은 간단했다. 레스토랑처럼 테이블을 세팅하고, 행사가 시작되면 음식을 운반하고 뒷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변수는 바람이었다. 바람에 테이블보가 펄럭펄럭거렸다. 고정이 필요해보였다. 저 멀리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야 ! 너! 저기 가서 호치캐스 받아와."

'언제 봤다고 반말을...'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나는 부끄러움이 많다. 하지만 배시시한 표정을 짓이기며 치밀어오르는 불쾌함은 천하무적 비비크림으로도 가릴 수 없다. 나는 운영테이블에 가서 스테이플러를 받아왔다. 그는 아주 중요하고 급박한 임무를 주는 보스처럼 내게 일을 설명했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테이블에 호치캐스를 박아. 알겠어?"

열심히 스테이플러를 박았다. 그 사이에 슬슬 손님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몇몇 정치인들도 참여하는 규모 있는 행사 같았다. 일을 나눠주려고, 나에게 반말을 했던 '그'가 알바들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을 알려드릴게. 잘 들어. (주절주절)"

A-Yo. 내빈을 의식했는지, 저절로 청년 일용직 노동자를 향해 존대를 하는 그의 태도 변화를 통해, 역시 '눈치'는 우리만의 고유한 단어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할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알바가 접대할 손님이 없는 노동이었으면 그는 꾸준히 반말을 했을 것이다. 이런 온도차를 보여주고 '왜 다들 이렇게 표정이 안 좋냐'라고 하면 무슨 말을 더 해줘야 하냐. 그래도 '그'는 자동으로 존대 패치가 되었지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돌아다니는 주최 측 아저씨 몇몇은 '야', '너', '이거 해, 저거 해' 등 시종일관 반말로 일관했다.

편견일 수 있겠으나, 이 행사가 정치인이 참여한, 정치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행사임을 감안하고, 이 행사를 주최하고 기획하고 운영하는 중간관리자급 이상이 다 정치인이거나, 최소한 한두 군데 정치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역시 정치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싶었다. 매번 총선, 대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허리가 부러져라 굽신 거리며, 팔꿈치와 어깨와 손아귀가 아작날 정도로 악수를 해대다가, '내빈'만 없어지면 다시 휘하 사람들에게 반말을 할 게 뻔해보였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걸 느꼈다.

 

2.

일 세팅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왠지 나 빼고 다들 아는 사이 같았다. 원래 알던 사이거나, 일을 하면서 말을 튼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혹시 후자인지 판별하기 위해 옆에 있던 여자분에게 말을 걸었다.

"(정중하게) 혹시 오늘 몇 시에 출근하셨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세 시요."
"아..."

우리의 대화는 천막 아래, 통풍이 잘 되는 쾌적한 곳(태양을 막아주고, 바람도 선선한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감안해도, 그녀가 왜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는지 알 수가 없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걸 수도 있고, 이미 짜증이 나있는데 내가 말 걸어서 더 짜증이 난 걸 수도 있다. 말을 괜히 걸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면 그냥 사람을 경계하는 걸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내가 그 사람 속을 어찌 알겠나.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평온하던 나도 짜증이 났다는 것이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정중하게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생판 몰라도 가급적 정중하게 그에게 대답해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굳이 정중하게 해야하나라는 현자타임도 맛보면서 퇴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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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미 지나간 일.

이미 발생한 일.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일.

 

과거를 후회할 힘으로

오늘을 더 나은 오늘로 만들기.

 

과거를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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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에 애쓰고 있다면, 글쓰기가 필요하다'라는 말에 신청했나보다.

 

상반기가 일찍 끝나니, 당장 할 것이 없었다. '일단 쉬라'는 지인들의 조언이 많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가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뭔가를 하자니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쉬자니 불편하고, 하고 싶은 것은 없는 상황이다. 그때 갑자기 태재 작가님의 [에세이 스탠드: 내 생활을 조명하는 글쓰기] 수업이 생각났다. (결국 글인 건가)

 

태재, <스무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태재 작가님의 신간 <스무스>는 태재 님 본인의 수영 기록이다. 부제는 <불가능했던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지기까지 10개월간의 수영장 에세이>. 그는 어린 시절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경험 이후로 수영과 담을 쌓았다고 한다. 20대 후반, '수영을 못 한다'는 마음의 소리(?)를 조정하여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로 바꾸고 수영에 도전했다. 내가 수영을 열심히 하는 걸 아는 사람들이 <스무스>를 추천해줬고 정말 단숨에 재밌게 읽었다. 꾸준한 기록의 힘이 이렇게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나의 게으름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세이 스탠드 수업을 들은 지인의 얘기를 듣고 언젠가는 수업을 들어봐야지라며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 '언젠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개강 당일 댓글을 남기고, DM을 보내서 수업을 신청했다. 다행히 내가 막차를 탔다. 수업은 늦은 8시였다. 나는 오후 6시에 수영을 하고, 7시에 밥을 먹고, 연남동으로 슬슬 걸어갔다. 연남동 487-6. 집에서는 약 20분이 걸렸다. 봄과 여름의 경계에는 가을의 프리뷰가 녹아 있다. 연남동의 낮은 건물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걸었다. 초행길이라 노을보다 네이버 지도를 더 많이 봐서 아쉬웠는데, 다음주에는 노을만 보면서 걸어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연남동 487-6 헬로헬로

 

태재 님의 소개가 끝난 후, 짤막한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민경입니다. 스물아홉살이고, 아직 직업은 없습니다. 지인이 <스무스>라는 책을 추천해주셨고, 그래서 태재 님과 이 수업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왜 신청했는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지금 딱히 할 게 없고, 게워내고 싶은 게 많아서 신청한 것 같습니다.

 

팩트였고,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잘 오셨네요'라고 태재 님이 인사를 해주셨다.

 


<글과 글쓰기에 필요한 공간과 환경>

1주 차 수업의 주제는 <글과 글쓰기에 필요한 공간과 환경>이었다. 수업은 대체로 태재님의 설명과 질문, 그리고 수강생들의 답변으로 진행된다. 가급적 모든 수강생들이 고루고루 말할 수 있도록 신경 쓰시는 것이 느껴졌다. 

 

1. 태도

Q. 가끔 일기를 쓰시나요?

Q. 일기와 에세이는 다를까요?

Q. 그때 왜 일기를 썼어요?

Q. 편지와 에세이는 다를까요?

 

일기, 편지, 그리고 에세이의 차이는 '관계성'의 차이라고 말씀하셨다.

일기는 작가와 독자가 모두 자기 자신이다. 나와 나가 관계를 맺는 글이 일기이다.

편지는 작가인 나와 특정 소수의 독자가 관계를 맺는 글이다.

그리고 에세이는 작가인 나와 불특정 소수 및 다수의 독자가 관계를 맺는 글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관계맺는 방식) 이 글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셨다. 자신을 속이지 말고, 솔직하게 용기를 가지고 쓰자는 말씀이 좋았다.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또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길에서 스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0은 아니지만 높지는 않다. 하지만 길에서 친구를 만났다면, 약속 등의 형태로 그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높다. 그런 의미에서 글이란 작가와 독자가 관계를 맺게 해주는 계기인 것 같다. 생각이 다른 작가라도, 살아온 환경이 나와 다른 사람이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오프라인이든, 책으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근사하다

'근사하다'의 사전적 의미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짧은 글에 익숙해졌다. 짧은 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생각을 연쇄적으로 하기 어려워진다는 것과 비슷하다. 태재 님은 "재미있어"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서, 좀 더 근사(近似)하게 표현하자고 하셨다.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좀 더 근사하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는 태재 님이 가진, 글에 관한 가치관인 것 같기도 하다. 간결한 문장으로 다듬고,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읽다, 의견을 읽다, 관점을 읽다, 태도를 읽다, 말투를 읽다, 주장을 읽다 등등 어떤 말로 바꿔도 글을 읽는다는 말과 통한다. 일기는 오늘 하루 동안 내가 가졌던 생각을 읽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쓰는 글은, 글자로 쓰는 내 생각이다.

 

2. 공간과 환경

글을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쓰는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쓰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무엇이 됐든 자신에게 맞는 환경과 공간을 찾아야 한다.

 

나만의 글쓰기 환경을 찾아서 만들기

 

  • 시간
  • 공간
  • 노트북 / 연필 / 펜(펜이라면 무슨 펜으로 어떤 종이에?)
  • 조도
  • 소음의 정도 / 배경음악
  • 온도 / 습도 등등

뭐 이렇게 까다롭나 싶을 수 있다. 글이 아니더라도, 뭔가를 할 때 본인이 선호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다. 도서관의 칸막이 열람실보다 트인 열람실이 더 공부가 잘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글도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서 써야 생각이 잘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소음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소음이 많은 카페에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볼륨을 높여서 기타 소음을 차단한다. 그런데 태재 님도 비슷한 방법을 쓰고 계셔서 놀랐다.

 

인상 깊었던 것은, 손으로 글을 쓰기를 추천하셨다는 점이다. 나는 글을 펜으로 쓰는 것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글을 설계해서 쓰기 보다는 단숨에 몰아쳐서 워드에 쏟아내고, 계속 글을 고치고 수정한다. 태재 님은 '생각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손으로 글을 끌고 나가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3. 느낀점

나의 글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 글을 지쳐하는 사람들도 많고, 덕분에 별의별 피드백을 다 들어봤다. 가까워진 사람도 있고, 멀어진 사람도 있다. 가까워진 사람과는 내 글을 통해 관계를 맺은 것이고, 멀어진 사람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것이겠구나. 아직, 솔직하게 글을 쓰는 것이 무섭다. 

 

쉬는 시간에 태재 님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어느 쪽을 지망하는지, 마케팅이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해 말씀드렸다. 힘이 빠져서 뭔가 허탈한 말투였던 것 같다. 그리고 '글을 같이 쓸 사람들, 공동체가 필요했다'는 말을 했는데, 적극 동의해주셨다. 글 쓰는 공동체는 태재 님이 에세이 스탠드를 매월 진행하시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연남동의 8시는 고즈넉하다. 수업을 하는 곳은 연트럴파크와 거리가 멀어서 조용하고 평온하다. 또한 조명도 포근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수업을 신청하기를 잘한 것 같다.

 

'솔직하게, 용기를 가지고 쓰자'는 말이 가장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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