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수요일, 광화문 광장에서 당일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세먼지 속 다이닝>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말 그대로 미세먼지가 가득한 광화문 광장에서 밥을 먹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시간에 맞춰 3시에 갔다.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출석체크를 하고 스태프 목걸이를 찼다. 일은 간단했다. 레스토랑처럼 테이블을 세팅하고, 행사가 시작되면 음식을 운반하고 뒷정리를 하는 일이었다. 변수는 바람이었다. 바람에 테이블보가 펄럭펄럭거렸다. 고정이 필요해보였다. 저 멀리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나를 손가락으로 지목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야 ! 너! 저기 가서 호치캐스 받아와."
'언제 봤다고 반말을...'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나는 부끄러움이 많다. 하지만 배시시한 표정을 짓이기며 치밀어오르는 불쾌함은 천하무적 비비크림으로도 가릴 수 없다. 나는 운영테이블에 가서 스테이플러를 받아왔다. 그는 아주 중요하고 급박한 임무를 주는 보스처럼 내게 일을 설명했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테이블에 호치캐스를 박아. 알겠어?"
열심히 스테이플러를 박았다. 그 사이에 슬슬 손님들이 하나둘씩 입장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몇몇 정치인들도 참여하는 규모 있는 행사 같았다. 일을 나눠주려고, 나에게 반말을 했던 '그'가 알바들을 불러모았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해야할 일을 알려드릴게요. 잘 들어요. (주절주절)"
A-Yo. 내빈을 의식했는지, 저절로 청년 일용직 노동자를 향해 존대를 하는 그의 태도 변화를 통해, 역시 '눈치'는 우리만의 고유한 단어이자 문화로 자리매김할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알바가 접대할 손님이 없는 노동이었으면 그는 꾸준히 반말을 했을 것이다. 이런 온도차를 보여주고 '왜 다들 이렇게 표정이 안 좋냐'라고 하면 무슨 말을 더 해줘야 하냐. 그래도 '그'는 자동으로 존대 패치가 되었지만,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돌아다니는 주최 측 아저씨 몇몇은 '야', '너', '이거 해, 저거 해' 등 시종일관 반말로 일관했다.
편견일 수 있겠으나, 이 행사가 정치인이 참여한, 정치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행사임을 감안하고, 이 행사를 주최하고 기획하고 운영하는 중간관리자급 이상이 다 정치인이거나, 최소한 한두 군데 정치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역시 정치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싶었다. 매번 총선, 대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허리가 부러져라 굽신 거리며, 팔꿈치와 어깨와 손아귀가 아작날 정도로 악수를 해대다가, '내빈'만 없어지면 다시 휘하 사람들에게 반말을 할 게 뻔해보였기 때문이다.
뭐... 그런 걸 느꼈다.
2.
일 세팅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왠지 나 빼고 다들 아는 사이 같았다. 원래 알던 사이거나, 일을 하면서 말을 튼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혹시 후자인지 판별하기 위해 옆에 있던 여자분에게 말을 걸었다.
"(정중하게) 혹시 오늘 몇 시에 출근하셨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세 시요."
"아..."
우리의 대화는 천막 아래, 통풍이 잘 되는 쾌적한 곳(태양을 막아주고, 바람도 선선한 곳)에서 이루어졌음을 감안해도, 그녀가 왜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는지 알 수가 없다. 고된 노동으로 지친 걸 수도 있고, 이미 짜증이 나있는데 내가 말 걸어서 더 짜증이 난 걸 수도 있다. 말을 괜히 걸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면 그냥 사람을 경계하는 걸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내가 그 사람 속을 어찌 알겠나.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평온하던 나도 짜증이 났다는 것이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정중하게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생판 몰라도 가급적 정중하게 그에게 대답해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굳이 정중하게 해야하나라는 현자타임도 맛보면서 퇴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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