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에세이 스탠드] 수업 1주차 과제입니다.
한 달 만에 집에 내려갔다. 집은 조용했고, 안방에서는 어머니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분과 통화를 하시는 것 같았다. 조용히 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갔다. 분명 저녁을 먹었는데 허기가 졌다. 찬장을 뒤져 너구리 한 봉지와 냄비를 찾았다. 거창한 음식을 해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물을 붓고 분말 수프, 플레이크, 다시마를 차례대로 넣었다. 빨간 국물이 팔팔 끓기 시작했다. 면을 넣고 잠시 기다렸다가 젓가락으로 면을 휘휘 저었다. 냄비 가운데에 모인 면을 헤치고 계란을 하나 풀어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어머니가 부엌으로 나오셨다.
“저녁 안 먹었어? 왜 라면을 먹어?”
“먹었는데 배고파서요.”
식탁에 놓인 그릇에 라면을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이소박이가 있었다. 라면은 보통 배추김치와 먹곤 하는데, 냉장고에는 오이소박이뿐이었다. 부추와 양념에 범벅이 된 오이소박이가 과연 라면과 맞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김치를 꺼내서 써는 게 귀찮아서 그냥 오이소박이를 먹기로 했다. 시큼하게 익은 것이 의외로 입에 잘 맞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 다시 취업 준비해야죠.”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거듭된 취업 실패 속에서 용기를 잃어가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부모님도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육체의 짐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취업 후 부모님을 위한 계획도 많이 짰다. 일본 여행도 보내드리고, 회도 사드리고, 용산 CGV IMAX에서 액션 영화도 보여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허망한 표정으로 부엌 한쪽에서 라면을 먹고 있다.
사실, 내가 잘하는 음식이라고는 라면밖에 없다. “오빠, 요리할 줄 모르면 나중에 집에서 쫓겨날 걸”이라는 동생의 장난이 더 실감 나는 요즘이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없으니 취업 판에서 쫓겨난 것 같다. 세상에서 부가가치를 만드는 일을 못 한다는 것이 서글펐다. 그래서 라면은 밥값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내가 내리는 벌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나의 탓을 하지 않기에, 최소한의 양심으로 내리는 벌이 라면인 것 같다.
언제쯤 마음 편하게 라면을 끓여 먹는 날이 올까.
아니, 이제는 라면보다는 집밥을 맘 편히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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