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에세이 스탠드] 2주 차 과제입니다.
여름 냄새나는 5월이다. 지하철 1호선의 에어컨 바람에서는 곰팡내가 나고, 몸과 옷 사이에 습기가 차기 시작한다. 여름이 오고 있다. 어제는 봄의 마지막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비 비린내는 묵직했고, 비를 맞은 나뭇잎은 더 짙은 녹색이 된 것 같다. 여름을 판별하는 나만의 리트머스지 - 에어컨 속 곰팡내, 옷 속 습기, 봄비의 비린내 - 가 계절에 응답하면, 냉면집으로 향한다.
냉면은 종류가 다양하다. 함흥냉면, 평양냉면, 해주냉면 등. 냉면의 원조가 어디냐를 두고 논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 정도로 냉면에 조예가 깊지 않다. 특정 지역의 냉면을 초월해서 ‘냉면’이라는 음식 자체를 좋아한다. 냉면은 그 온도만큼 저릿한 느낌으로 영혼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울푸드이다.
1.
여름을 좋아하지만, 여름을 심하게 탄다. 초등학교 때 한약을 지으려고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가 진맥을 해보더니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열치열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차가운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사람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더위에 지쳐 헥헥거리는 나와 동생에게
“냉면 사주랴?”
라고 말씀하셨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에게 긍정의 표시를 내비쳤다. 할머니는 [원조칡냉면] 전단지를 꺼내신 후, 전화를 걸어 냉면을 주문하셨다. 약 30분 후 오토바이 헬멧을 쓴 아저씨가 도착했다. 아저씨는 현관에 쪼그려 앉으셔서, 냉면 사리가 담긴 스티로폼 그릇과 육수가 든 플라스틱 물통을 꺼냈다. 살얼음이 동동 뜬 육수가 면에 부어지면 우리는 재빨리 식탁으로 냉면을 운반했다. 할머니의 감사 기도가 끝나면 허겁지겁 냉면을 먹어 치웠다. 그 순간만큼은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열치열보다는 이냉치열이 더 맞는 스타일이었다.
여름마다 할머니께서 사주신 냉면은 습관이 되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냉면집으로 향한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먹는다. 소화기가 약하지만, 아직 냉면을 먹고 체하거나 아픈 적은 없으니, 이 정도면 운명이 아닐까?
2.
할머니의 훈육(?)덕분에 여름만 되면 냉면을 찾던 나는 2017년 겨울부터 계절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먹었다. 2017년 11월은 인생 최악의 한 달이었다. 입사 서류를 낸 모든 회사에서 탈락했고, 로스쿨 입학도 실패했다. 진로 상 암초에 부딪히니 부모님과 자주 다퉜고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여자친구와의 이별이었다. 이쯤 되니 인간의 기본 욕구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는데 5kg이 빠졌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친구 H가 전화를 걸었다.
“괜찮냐?”
“…….”
“됐고, 냉면이나 먹으러 가자.”
<필동면옥> - H의 말로는 유명하다는데 나는 처음 들어 본 - 이었다.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니 미쉐린 가이드가 선정한 맛집이라는 패가 걸려 있다. 우리는 물냉면과 수육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냉면 육수를 들이켠 후, 한 젓가락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 . . .
당시 나는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하지만 속을 열어보면 안에 천불이 났던 것이 분명했다. 취업, 인간관계, 가족 문제가 내면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냉면을 먹은 순간 그 불이 꺼진 느낌이었다. 위에 언급한 감탄사(아 . . . )는 속을 태우던 불이 꺼지면서 난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종교도 주지 못한 평화를 냉면에서 찾다니. 수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냉면만 먹었다. 육수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기 위함이었다. 훗날, 친구는 그때의 내가 눈물짓고 있었다고 전했다.
요즘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냉면을 먹는다. 폭염일 때는 물론, 슬프거나 화가 날 때, 세상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냉면을 먹는다. 육수의 깊은 맛, 면의 재료, 탄력 등은 잘 모르겠다. 다만, 지치고 깨지고 까맣게 타버린 속을 위로해 줄 음식은 냉면밖에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냉면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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